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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용 前 인사수석이 털어놓은 '청와대 시절 뒷이야기' -시비에스 노컷뉴스

등록일: 2006-05-19


정찬용 前 인사수석이 털어놓은 '청와대 시절 뒷이야기' -시비에스 노컷뉴스 "조급한 언론 때문에 인사검증 제대로 못하기도" 지난해 1월 교육부총리 인사 파동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정찬용 전 청와대 인사수석이 1년여 만에 공개적인 자리에서 청와대 재직시절 뒷얘기를 솔직 담백하게 털어놨다. 정찬용 전 수석은 18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 출연해 "(장관 등을 발탁할 때)유능함 보다는 열정이 있느냐를 먼저 고려했고 다음에는 조직에서 함께 일한 사람들의 평을 듣고, 이어 언론사 해당 분야의 고참 기자들 서너 명에게 물어보면 대개 답이 나왔다"고 밝혔다. 정 전 수석은 "미국에서는 한 인사를 검증할 때 6주에서 6개월이 걸리고 장관직이 비어 있어도 문제를 삼지 않지만 우리 언론들은 '빨리 안 한다'며 욕을 해대는 통에 검증을 제대로 못해 실패한 경우도 있다"며 실패한 인사를 언론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이와 함께 정 전 수석은 "간송 미술관의 최완수씨와 소설가 송기숙씨에게는 함께 일하자고 여러 번 제의했지만 거절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청와대 인사수석을 맡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대통령께 왜 저를 선택하셨냐고 물었더니 '당선자인 나 노무현도 정치적 빚을 진 적이 별로 없는데, 정찬용씨도 남에게 외상 안지고 산다고 하니 우리 둘이 인사를 맡으면 빚 갚을 일 없이 공정하게 하지 않겠냐'고 하셨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 노 대통령과의 첫 인연은 언제였나요? 제가 거창에서 지역운동을 할 때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노동자들 수십 명을 데리고 거창으로 캠프를 왔어요. 노동자들도 산에 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호연지기를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 때 저에게 농촌 현실에 대해 강연을 해달라고 청하셨어요. 그때 처음 만나 뵌 거죠. 근 20여 년 전 일입니다. - 노 대통령의 첫 느낌은 어땠나요? 매우 진지하셨어요. 캠프에 참석한 노동자 80여명의 경비를 당시 노 변호사가 많이 조달하신 것 같았고,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공손했어요. 말을 할 땐 항상 앞에 손을 모으셨죠. 매우 진지하고 공손하다는 느낌이었어요. - 청와대 인사수석을 맡게 된 계기가 있나요? 12월 26일에 서갑원이라는 국회의원이 저에게 전화를 했어요. 대통령 당선된 분과 통화 한번 하겠냐고 하길래 '그 바쁜 분과 뭐 하러 통화하겠소, 축하한다고 전해주십시오, 다음에 광주에 오시면 소주라도 한잔 사시라고 전해주십시오'라고 말했죠. 그러고 나서 1월 28일에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께서 광주에 오셔서 저에게 같이 일하자고 하시더라고요. 나중에 대통령께 어째서 절 선택하셨냐고 물었더니 "당선자인 나 노무현도 정치적인 빚을 진 적이 별로 없는데, 내가 알아보니까 정찬용 씨도 남에게 외상 안 지고 산다고 들었다, 그러니 우리 둘이 인사를 맡으면 빚 갚을 일 없이 공정하게 하지 않겠냐"고 하시더군요. - 사람을 고를 때 어떤 면을 가장 먼저 보시나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능한데요. 저는 열정이 있느냐를 먼저 봐요. 아무리 유능해도 심드렁한 사람은 재미없죠. '이건 한번 해보자'라는 강한 열정이 있느냐를 중요하게 봅니다. 그 다음엔 평판을 듣죠. 조직에서 함께 일하던 상하좌우 사람들의 평을 듣는데 그 평들이 대개는 맞아요. 그리고 언론사 해당 분야의 고참 기자들 서너 명에게 물어보면 대개 답이 나옵니다. 언론사에서 20여년 이상 일한 분들은 눈이 정확하고, 정보가 많고, 또 심층 인터뷰를 많이 하다보면 사람에 대해 잘 알아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사에 있어서 실패한 경우는? 인사 절차는 제가 혼자 하는 게 아니에요. 저희들이 자료를 모아서 평판조회를 하고, 인사추천회의에서 두 번 정도 걸러서 토론을 하고, 그걸 대통령께 보고 드리고, 민정수석이 검증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100점짜리가 나오는 건 아니죠. 성공한 경우도 좀 있고, 어쩌다 저렇게 했을까 싶은 경우도 있었죠. 근데 미국에선 한 사람의 인사를 검증할 때 6주에서 6개월이 걸려요. 장관직이 비어있어도 문제 삼지 않죠. 장관이 없으면 차관이 일을 하고 있다가 검증을 거쳐서 장관을 모셔오면 되는데,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빨리 안 한다, 한 지붕 두 가족이다'라면서 엄청 욕을 해요. 그러니 전 장관과 새 장관 사이에 인수인계 할 시간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서 검증을 하다보니 실패한 경우도 있죠. 그리고 저희의 청을 거절한 분들이 기억나네요. 간송 미술관의 최완수 씨의 경우 여러 번 자리를 청했는데도 거절하시더라고요. '내 나이가 작년에 환갑이었는데 지금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나에겐 시간이 많지 않으니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며 거절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소설가 송기숙 씨에게도 청했는데 거절하셨어요. '모처럼 화순에 집 한 칸 지어놓고 기분 좋게 잘 살고 있는데, 서울 가서 복작거리지 못 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 청와대를 나올 때 일종의 문책성 인사였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말할 수 있죠. 당시 교육부 장관을 임명하시는 일에 제가 보좌를 더 잘 해드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때니까. 그리고 청와대 수석이라는 게 상당히 힘들고 정신적 부담이 많은 자리에요. 그런 일을 혼신의 힘을 다해 2년 동안 하면 진이 빠지게 돼 있어요. 마라톤을 완주하면 툭 쓰러지는 것처럼 저도 2년 동안 열심히 해서 지칠 때이기도 했죠. - 청와대 문을 나설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두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우선은 재밌었다, 그리고 이제 좀 쉬어야겠다. 보람되고 재밌었지만 좀 쉬고 싶었어요. 그래서 며칠 동안 전라남도 담양 집에 가서 잠만 잤어요. - 고향이 전남 영암이시죠? 어떤 곳인가요? 전라남도 남쪽 부근에 있는데 세발낙지가 유명해요. 나무젓가락에 술술 감아서 먹는 게 맛있죠. 그리고 월출산이 유명해요.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 '남쪽에 아주 아름다운 산이 있는데, 청산에 뚝뚝 솟은 것이 월출산'이라고 칭찬할 만큼 아름다운 산입니다. 전 월출산을 45살에 처음 올라가 봤는데요. 다리는 고생하고 눈은 호강하는 산이에요. 굉장히 경관이 아름다워서 눈은 호강하지만 돌이 많아서 다리는 힘든 산이죠. - 언제 광주로 오셨나요? 국민학교 때 광주로 왔어요. 아버지가 국민학교 선생님이라서 전근 가신 아버지를 따라 왔죠. - 개인적으로 광주란 곳은 어떤 의미인가요? 국민학교 5학년부터 고교 졸업할 때까지 광주에서 살다가 대학 때문에 서울로 왔어요. 그러다가 이런저런 곡절이 있어서 경상남도 거창에 가서 17년 동안 있다가 43살에 다시 광주에 와서 살게 됐어요. 광주는 가난한 곳이에요. 제가 어렸을 때 뿐 아니라 지금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곳, 버려버린 곳, 소외된 곳,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 떠나가는 곳이라는 생각을 많이들 하죠. 피해의식이 많아요. 광주 5.18에 군인들이 우리를 쏘아버렸고, 경제적으로나 인사에서나 우리는 차별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많은 곳이에요. 그러나 최근 이런 피해의식을 떨치려는 노력이 조금씩 보여서 다행이에요. 5.18의 아픔을 극복하게 됐고, 또한 세계의 반란 혁명사에서 10여일의 기간 동안 권력이 시민에게 주어졌을 때 단 한 건의 폭력이나 절도가 없었다는 건 윤리적으로 매우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 5.18 때 어디에 계셨나요? 경남 거창 YMCA에서 지역 시민운동을 하던 시기였어요. 동료들과 저녁을 먹다가 광주에서 도망 오신 분을 통해 처음 그 얘기를 들었어요. - 그 때 심정은 어땠나요?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그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서 맞아죽으면 어쩌나 무섭기도 했죠. 결국 못 갔어요. 그날 밤새도록 술 마시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싸우기도 했고요. - 스물여섯에 거창에 내려가게 된 계기는? 대학을 다니다가 학생운동에 참여했는데,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을 1년 살았어요. 징역 살고 나오니까 갈 데가 없더라고요. 근데 당시 거창 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께서 거창에 놀러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놀러갔더니 이 학교에 있으면 어떻겠냐고 권하시더라고요. 거기서 5년 동안 교사 일을 했고, 나중에 YMCA에서 시민운동을 했죠. - YMCA에서 시민운동을 하면 생활엔 힘들지 않나요? 사는 건 견디는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어지간하면 다 안 죽고 견딜 수 있다고 봐요. 하지만 그러다보니 제 처가 고생을 많이 했죠. 제 처는 교편을 잡으면서 수입이 있었고, 저는 수입이 없었죠. - 거창에서 꽤 오래 계셨죠? 거창에서 17년 넘게 살았기 때문에 고향 같은 곳이에요. 거창은 산자수명하고 아주 아름다운 곳입니다. 북상이라고 하는 남덕유산의 흐름이 내려오고 있는데요. 굉장히 아름다운 골짜기의 물이 한쪽은 진주 남강으로, 한쪽은 낙동강으로 가죠. 그리고 사람들이 굉장히 강직합니다. 처음엔 무뚝뚝하지만 사귀어보면 아주 좋은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깊은 연을 가지고 17년 동안 살다가 마흔이 넘어가면서 고향이 그리워져 광주로 돌아왔죠. - 다시 돌아간 고향 광주는 어땠나요? '동네가 이래서 망해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단 피해의식이 강해서 큰일 났구나 싶었죠. 그래도 다행히 그 지역에서 갈망하던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돼서 한이 좀 풀렸어요.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변화의 가능성을 보는 것 같아요. 서남해안 개발사업 같은 게 그런 예죠. 거긴 버려놓은 땅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훼손되지 않고 자연이 살아있는 땅의 형태로 남아있는 거예요. 이런 곳이 21세기에는 사람 살기에 좋고, 산업화에도 도움이 된다는 거죠. 그런 희망을 갖는 것 같아요. - 예전과 요즘의 광주 분위기는 많이 다르죠? 예를 들어 80년대에는 택시기사들이 이중황색실선을 마구 유턴했어요. 그래서 이유를 물으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냐 무슨 상관이냐, 다른 군인들도 안 지키는데 우리가 왜 지키냐'는 식의 자포자기가 많았어요. 근데 이젠 그러지 않습니다. - 광주가 최근 문화중심 도시로 부각되고 있는데요? 문화라는 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문화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비엔날레를 하면 사람들이 시장 가다가도 그림을 보고 가는 거예요. 그렇게 그림을 보면서 '요새는 옛날처럼 김홍도가 그린 것이 아니라 저런 그림을 그리네, 나도 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시민들이 문화를 누릴 수 있는 도시여야 해요. 문화나 예술을 특정 공간에 밀어 넣지 않고 밖으로 나와야 해요. 최근 어떤 화가들이 광주 말바우 시장의 국밥집에서 그림 전시를 한다고 하던데, 이렇게 문화가 장외로 나와야 해요. 그것과 더불어 문화를 누릴 수 있는 시설도 필요해요. 미술관이나 박물관처럼. 요즘은 너무 시설 중심으로 생각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지만요. 그리고 산업화 될 필요도 있어요. 게임이든 영화든 소설이든 많은 이들이 공유할 수 있는 문화가 곧 경제적으로도 보탬이 되는 쪽으로 가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고 있어요. - 서남해안포럼은 무엇인가요? 균형발전이라는 국가적 정책이 있어요. 수도권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교통이나 주택, 교육 문제 등이 생기고 있죠. 영양 과잉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병리 현상이에요. 그런데 시골은 사람이 너무 없어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 경북과 전라도인데 이런 지역에서 살 수 있는 고민을 해야 하는데요. 제 고향이 전라도이다보니 일단 우리 동네일만이라도 걱정하자는 거죠. 국가의 도움만으로가 아니라 우리가 이 희망의 땅에 관광 등 3차 산업 위주로 일을 진행해보자, 그리고 농민들이 FTA 때문에 어렵다고 난리인데 미맥 중심이 아닌 고급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는 노력을 해보자. 그래서 일본이나 중국의 부자들에게 고급 농산물을 팔자는 생각을 해요. 그렇게 살 길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해 네덜란드에 있는 농협은행과 함께 논의하고 있어요. 그런 일들을 민간차원에서 하고 있어요. 그리고 정부의 도로나 철도 계획이 잘 실행될 수 있도록 하고, 국내외의 갈 곳 없이 헤매고 있는 민자의 투자 유치를 통해 고용도 창출하고. 그런 일들을 옆에서 잘 하도록 하는 민간단체입니다. - NGO 대사로도 활동하시죠? 우리나라엔 대사가 100분가량 있는데, 그 중 주미대사나 주일대사처럼 각국에 파견 나가있는 특명전권대사가 90분가량 있어요. 근데 이젠 외교가 굉장히 다변화 되어서 나라별로만 하는 게 아니라 분야별로도 민간인들이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해서 에너지 분야를 비롯해 8명이 대사직을 하고 있어요. 민간인이고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강금실 서울시장 후보도 전에는 저희들과 같이 여성 대사였고요. 점점 세상이 GO와 PO와 NGO, 그러니까 정부기구와 회사와 NGO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니까 세계 각국의 NGO들과 우리나라 및 우리나라의 NGO들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게 NGO 대사의 역할입니다. - 요즘은 담양 집에서 아시는 분들과 함께 재밌게 사신다고요? 몇 년 전에 아는 사람들끼리 시골 가서 살자고 뜻을 모아 땅을 좀 사두었다가 집을 지어서 지금은 여섯 가구가 같이 살고 있어요. 다같이 뜻이 맞고, 업무도 연관성이 있어요. 같이 식사도 하고, 등산도 하고 농사도 짓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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