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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가조 출신 김상훈(하) -도민일보

등록일: 2007-08-14


거창 가조 출신 김상훈(하) -도민일보 작품은 '어둠 속'…노래는 '햇살 속' '월북'으로 문학세계는 뒷전…거창 가조초교 교가는 아직도 불려 김상훈은 태어나자마자 이웃에 살았던 백부 김채환의 양자로 들어간다. 김채환은 가조 지역은 물론이고 거창 일대에서 널리 알려진 천석꾼이었다. 그러나 그 천석꾼 집안은 김상훈의 좌익 활동과 월북으로 인해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집안의 몰락과 월북. 김상훈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는 어려운 조건이다. 그런데 가조 지역에서는 김상훈의 숨결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었다. 지난했던 반공 콤플렉스와 난무했던 폭력 속에서도 김상훈은 사라지지 않고 가조에서 숨쉬고 있었다. ◇ 천석꾼 집안의 몰락 = 김상훈은 평소 친구들에게 "아버지는 한민당, 나는 공산당"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곤 했다. 또 김상훈이 보도연맹에 가입하기 직전 경찰에 잡혔을 때 아버지 김채환은 백방으로 뛰고 보증해 김상훈을 빼내는 열의와 수완을 보였다. 이를 두고 김상훈은 "한민당이 공산당을 석방시켜 줬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부자 간의 이념 갈등은 급기야 부친 김채환이 대문간에 '빨갱이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써 붙이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김상훈 시연구> 22p) 김상훈은 그의 시 '아버지의 문앞에서'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등짐지기 삼십리길 기어넘어/가쁜 숨결로 두드린 아버지의 문앞에/무서운 글자 있어 공산주의자는 들지마라…" 김상훈은 15세가 되던 해 조혼을 한다. 그런데 이 결혼은 1년 만에 끝이 나고 만다. 해산하던 아내가 뱃속의 아기와 함께 사망했던 것이다. 이후 19세 때 두 번째 결혼을 하고 3남 2녀를 두게 된다. 그리고 1949년엔 서울에서 강재화와 세 번째 혼인을 한다. 이때 집안은 토지개혁 등으로 몰락의 길을 접어들고 있었다. 또한 김상훈 주변의 동료 문인들은 월북을 계속하고 있기도 했다. 김상훈은 모친 별세 이후 새살림을 차린 아버지와 자신의 주선으로 상경한 생모를 돌봐야 했다. 아마도 이러 저러한 현실적 상황이 김상훈의 월북을 막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상훈은 결국 한국전쟁 시기 의용군으로 참전하게 되고, 북으로 밀려들어 간다. 김상훈의 두 번째 부인 임봉조는 이때 거창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현재 김상훈의 생가 바로 옆에서 살고 있는 김상훈의 9촌 조카 김윤자(여·69) 씨는 "큰 할아버지가 땅이고 집이고 다 팔아버리고 나니 아주머니(임봉조)는 친정에 가서 아이들을 키웠지.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 삼촌(김상훈)은 삼촌대로 그때 서울에서 결혼을 한 상태였고…. (김상훈은) 참 똑똑하고 잘 생긴 양반이었는데…"라고 말했다. ◇ 굳건하게 이어져 온 가조초등학교 교가 = 1930∼40년대는 농촌 지역에 하나 둘 학교가 세워지면서, 그 지역 출신 문인들이 학교 교가를 짓는 일이 잦았다. 1922년에 세워진 가조초등학교도 마찬가지다. 해방 후 잠시 고향에 와 있던 김상훈은 모교를 방문해 교가의 노랫말을 지었다. 이 교가가 지금까지도 불리고 있었다. 1년에 한번씩 열리는 가조초등학교 총동문회 행사 때면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부터 갓 졸업한 10대들까지 모두 이 교가를 입 모아 부른다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은 김상훈이 월북시인이라는 점이다. 월북시인이 지은 교가가 1950∼80년대를 거치는 동안 어떻게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지가 궁금했다. 실례로 좌익 계열에 몸담았던 남대우<본보 6월 4일·6월 12일자 12면 보도>의 경우 하동초등학교 교가를 작사했으나, 해방 이후 다른 노래로 바뀌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이러한 예는 허다할 것이다. 김상훈이 지은 교가 속에는 천박한 반공주의 폭력에 의해 금기시 되다시피 했던 '동무'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기도 하다. 이 학교 졸업생이기도 한 가조초등학교 신계성(55) 교감은 "김상훈이 월북시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흔한 이름이기도 해서 몇몇 집안사람들만 알았다 뿐이지 다른 사람들은 잘 몰랐을 수도 있다. 이 교가를 지은 김상훈이 월북시인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면 군사정권 시절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겠나. 어쨌든 우리는 이 교가를 자랑스럽게 불렀다"고 말했다. 그에 대한 문학적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때, 그가 남긴 작품이 어둠 속에 묻혀 있을 때, 그의 모교에서는 그가 지은 노래가 불리고 있었다. 김상훈은 잠시 잊혔지만 잊히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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