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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6.25 전쟁 때 한국군의 '집단처형' 묵인" -경남신문

등록일: 2008-07-07


"미군, 6.25 전쟁 때 한국군의 '집단처형' 묵인" -경남신문 6.25 전쟁 발발 직후 한국군과 경찰은 좌익인사 및 동조자들을 집단으로 사살했으며, 당시 미군은 이를 묵시적으로 인정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AP 통신이 5일 보도했다. AP 통신은 미 국립문서보관소 등지의 비밀해제 기록을 토대로 한 서울발 기사에서 이같이 전하면서, 당시 미군 장교들은 한국군이 집행한 '집단처형'을 참관하고, 카메라에 담았으며, 은밀히 상부에 보고했다고 고발했다. AP 통신은 이런 집단처형으로 10만 명이 넘는 좌익 인사 및 동조자들이 사살됐을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이들은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중반 불과 수 주 동안에 기소, 재판 같은 법적 절차 없이 죽음을 맞았다고 전했다. AP 통신은 광범위하게 각종 문서를 조사했으나, 더글러스 맥아더 당시 미 극동군사령관이 '약식 대량사살'을 중지시키기 위해 조치를 취했다는 징후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런 문제를 조사하고 있는 한국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는 미 국립문서보관소와 다른 문서고에서 때로는 방관하고, 때로는 불만을 표시하는 1950년 미국의 모호한(ambivalent) 태도를 발견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는 "그들(미군)이 처형을 중지시키지 않았다는 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라며 "그들은 범죄 현장에 있었으며, 사진을 찍고 보고서를 썼다"고 비판했다. AP통신에 따르면 미군은 1950년 7월 충남 대전 외곽의 한 처형장에서 이뤄진 남자 수십 명의 '살육' 현장에서 사진을 찍었다. 김동춘 진실화해위원은 이곳에서 3천-7천명의 한국민이 자국의 군.경에 총살당해 집단매장지에 던져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아버지가 처형당한 한 여성(57)은 "구체적 증거를 댈 수는 없지만, 우리 유가족들은 여기에 미국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대전에 주둔했던 미군 자문관 프랭크 윈슬로(81)는 AP 통신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한국은 당시 주권국이었다"면서 "당시 내게 있어 한국인들에 모든 책임이 있다는데 아무런 의문이 없었다"고 반박했다. 윈슬로는 또 당시 일명 '칠면조 사격(turkey shoot)'장에 가보자는 상관의 제의를 받고 자신은 이를 거절했으나, 다른 장교들은 참석해 그 후 반세기 동안이나 기밀 유지된 인간 살육의 끔찍한 사진들을 찍었다고 증언했다. 또 1950년 7월 초 북한군의 남하로 전선이 남쪽으로 밀리면서 미 공군 정보장교인 도널드 니컬스도 경기도 수원에서 1천800명 정도로 보이는 죄수가 사살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이를 사진 촬영했다고 AP 통신은 덧붙였다. 미국의 이 같은 불분명한 태도는 서울이 수복된 1950년 가을에도 계속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이 미국에 항의하자 딘 러스크 당시 미 국무부 차관보는 미군 사령관들은 '그 같은 잔혹행위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미군의 행위에 제동을 건 것을 영국군이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영국군 장교들은 (1950년) 12월7일 미군이 점령한 북한 지역에서 총살을 위해 한 줄로 늘어서 있는 민간인 21명의 목숨을 구했다. 영국군은 이어 같은 해 12월 말 더 이상의 대량학살을 막기 위해 서울 외곽에 있는 이른바 '처형의 언덕'을 장악했다고 AP 통신은 전했다. 6.25 전쟁 전문가인 미 시카고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한국에서) 수천 명이 학살된 이후 미국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대전 학살 사건을 숨겼다"면서 1950년 한국에서 일어난 일에 미국도 책임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한국전 전문가이자 오하이오 주립대 명예교수인 앨런 밀레 박사는 "나는 이 사람들(미군)의 책임을 입증할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다"고 이견을 나타냈다고 AP통신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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