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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백서와 기록의 객관성

역사학자 신용균

이름을 붙이는 데는 의도가 있다. 자식 이름을 지을 때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담는다. 책도 마찬가지다. 제목에는 저자의 의도가 담겨 있다. 그렇지 않은 책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이 대표적이다. 세종실록은 그냥 ‘세종실록’이지, 다른 토를 달지 않는다. ‘백서’도 그러한 책이다.

 

백서에는 제목이 없다. 예컨대, 그냥 ‘경제백서’, ‘외교백서’, ‘운동백서’다. 따로 제목을 단다면, 그것은 이미 백서가 아니다. 왜 그런가? 백서는 객관적인 기록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백서에 정확한 자료를 충분히 싣는 것도 그 때문이며, 사후에 펴내는 것도 그 때문이며, 이해관계가 없는 학자들이 편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출발부터 그랬다. 17세기, 그러니까 지금부터 400여 년 전에 영국 정부는 매년 경제보고서를 펴냈는데, 그 표지가 흰색이었다. 그래서 ‘백서’(White Paper)라고 불렀다. 프랑스에서는 노란 표지였기에 ‘황서’라고 했고, 이탈리아에서는 초록 표지라서 ‘녹서’라고 불렀다. 미국이나 독일, 일본에서는 영국을 본떠 백서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서 백서가 처음 나온 것은 1962년 ‘경제백서’였는데, 그 또한 그냥 백서였다. 백서란 그런 책이다. 무미건조한 객관적인 자료집이다. 그래서 일반인이 백서를 보는 일은 드물다. 반면, 정부나 학자에게는 무척 요긴한 자료가 된다.

 

올해 거창군수가 거창 교도소 백서를 펴낸다고 한다. 그러나 이름과는 달리 백서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워 보인다. 우선, 제목부터 “거창구치소 갈등 해소 백서”란다. 의도가 뻔히 보인다. ‘군민의 갈등을 해소’ 했다는 거창군수의 치적 자랑이다. 그것도 현직 군수니 자화자찬이다. 거기다가 교도소 찬반 양측의 협상 대표가 합세하였으니 속도감도 있을 것이다. 염치없는 짓이다. 낯부끄럽다.

 

백서의 생명인 객관성을 확보할 가능성도 없다. 편찬위원회의 면면을 보니, 교도소 찬성 측이 공무원 3명을 포함한 5명이고, 반대 측이 3명이다. 다수결로 결정한다고 하니, 어떤 책이 나올지는 불문가지다. 객관성은 다수결로 담보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출발부터 싹수가 노랗다. “갈등 해소”가 아니라 새로운 갈등을 만드는 일이다.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정을 참고하면 된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자랑거리다. 그 이유는 단지 기록의 방대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객관성을 담보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이랬다.

 

왕조실록은 반드시 왕이 죽고 난 다음에 편찬했다. 왕의 살아있을 때는 자료만 남겼다. 춘추관에 사관을 두고, 사관은 모든 회의에 참석하고, 모든 자료를 모으고, 모든 결정사항을 수집해서, 기록해서, 창고에 보관하였다. 그 기록을 사초(史草)라고 하고, 그 창고를 사고(史庫)라고 했다. 사초는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설사 왕이라고 하더라도 보지 못했다. 연산군과 같은 독재자도 마찬가지였다.

 

이 원칙은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예외 없이 철저히 지켜졌다. 어찌 놀랍지 아니한가! 왕이 승하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정부에서는 실록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사고를 열고, 사초를 검토하여, 실록을 편찬했다. 그래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었다. 백서 편찬도 그렇게 하면 된다. 지금은 백서를 편찬할 때가 아니다. 더구나 당사자가 현직 군수이지 않은가!

 

이왕 편찬위원회가 구성되었으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자료를 모으는 일이다. 마침, 공무원과 찬반 양측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좋은 조건이다. 의미도 크다. 지금 자료를 모아두면, 언젠가 백서를 편찬할 때 소중한 사료가 될 것이다. 그들의 이름도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에게도 공개하면 안 된다. 당연히 군수도 그 자료를 보면 안 된다. 온라인으로 올려도 안 된다. 그 즉시 객관성이 상실된다. 그러니, 편찬위원회가 자료 수집만 수집해 놓으면 장차 높이 평가될 것이요, 지금 백서를 편찬하면 그것은 편향된 쓰레기가 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함께하는 거창 대표 신용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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