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er

‘교육도시 거창’의 전망 - 함께하는 거창 신용균 대표

거창민주평통 주최, 교육토론회 발표문

신 용 균(함께하는 거창 대표, 역사학자) 

 


거창 민주평통에서 “평화와 교육”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연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평화’는 교육에서 가치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의미 있는 토론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내용의 측면에서는 평화 교육으로 접근할 수 있으며, 또 방법의 측면에서 평화의 실천으로 접근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필자는 그것을 담아내는 틀로써 “교육도시 거창”에 관심이 있다.

 


교육도시는 오랫동안 거창의 이미지이기도 했고, 또 거창 사람들이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어떻게 교육도시를 이루어 낼 것인지를 생각하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필자는 몇 달 전, 거창군이 거의 1천억 원을 들여 소위 ‘거창군복합교육센타’를 건립하려는 계획에 반대하여, 거창을 교육도시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이것을 논의할 협의체를 만들고, 거기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글을 지역 신문에 쓴 적이 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 이 논의를 좀 더 진전시켜 보고자 한다. 다만, 거창시민단체의 입장이라기보다는 거기에 몸을 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의 의견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우선, 교육도시라는 개념부터 정리해보고자 한다. 전형적인 교육도시는 ‘학교로 이루어진 도시’를 뜻한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볼 때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두 도시는 모두 영국의 농촌 지역 도시지만, 그 도시는 수십 개의 대학으로 가득 차 있다. 대학과 대학이 담장을 맞대고 있으며, 거리와 상점은 대학 캠퍼스를 잇는 통로이다. 수백 년에 걸쳐 영국에서 국가적으로 계획, 발전시킨 결과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도시는 흔치 않다.

 


반면, 이탈리아의 볼로냐와 파도바 정도면 교육도시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두 곳 대학 역시 중세 때부터 유명한 학교였다. 이 대학에서 인상적인 것은 대학 건물에 걸려 있는 중세 유럽 귀족 가문의 문장이었다. 유럽의 유명한 귀족 가문 자제들이 이 대학에서 공부했고, 그것을 기념해서 자기 가문의 문장을 벽에 걸어 둔 것이다. 그 모습이 장관이기도 하거니와 동시에 유럽 각지에서 얼마나 이 대학의 명성이 높았는지를 말해주기도 한다.

 


여기에 비추어 보면, 교육도시는 한 지역에 볼로냐와 파도바와 같은 유명한 학교가 있고, 각지에서 유학을 오는 도시면 교육도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된다. 거창을 교육도시로 구상한다면, 이러한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두 대학을 든 것은 교육도시의 개념을 도출하는 과정이므로, 거창을 교육도시로 구상할 때에는 대학뿐만 아니라 초중고를 포함해야 할 것이며, 교육의 내용과 방법 또한 새롭게 모색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교육도시’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촌 지역이 발전하기란 쉽지 않다. 이 점은 선진국이라고 하는 유럽도 마찬가지인데, 한때 명성을 누렸던 도시가 지금은 쇠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도 활력 있는 도시라면, 1) 산업도시, 2) 관광도시, 3) 문화도시 등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예컨대, 포도 생산과 강과 포구라는 지리적 이점을 연결해 포도주 산업으로 활기를 띠는 프랑스 보르도가 첫째 유형이라면, 알프스와 지중해 지역의 관광도시가 두 번째 유형이라고 할 것이다.

 


세 번째는 지역과 문화를 연결해 활력을 찾은 유형이다. 아비뇽이 여기에 해당한다. 아비뇽은 프랑스의 작은 지역 도시이다. 이곳의 특징은 중세 교황청이 있었던 곳으로, 도시가 중세 성곽으로 둘러 있고 인근에 교황청의 유적이 남아있다. 이 유적을 연극제와 결합해 ‘아비뇽 연극제’를 개최하여 지역의 활력을 되찾았다. 쇠락한 지역이 세계적 문화의 명소로 재탄생한 것이다.

 


거창을 교육도시로 전망하는 것은 이 유형에 해당한다. 아비뇽에 중세의 문화유산이 있다면, 거창은 천혜의 자연유산을 가진 곳이다. 또한, 연극이 친 문화유산이라면 교육은 친 자연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자연과 교육을 결합해 ‘교육도시 거창’을 전망할 수 있으며, 이것은 곧 관광도시나 산업도시보다 깨끗하고 품격있는 문화도시를 의미한다.

 


이제, 거창 교육사를 통해 실천 방안의 교훈을 얻고자 한다. 지난 600여 년의 거창 교육사를 정리하면,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조선 5백 년 동안은 거창향교가 중심이었으며, 30여 개의 서원ㆍ재실과 200여 곳의 서당이 있었다. 둘째, 20세기 전반기 즉 식민지 시대에는 거창초등학교를 비롯한 각 면의 초등학교, 기독교 계열의 사립학교, 그리고 공립 중등학교 1개교가 세워졌다. 셋째, 20세기 후반기로 현재의 중등학교와 2곳의 대학교가 설립된 시기이다. 매 시기 거창인들의 학교 설립 열정은 매우 컸지만, 그중 시기별로 인상적인 사실을 하나씩만 검토해 보고자 한다.

 


첫 단계, 조선 5백 년 거창 교육사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김인순 부사의 용천정사 중건이다. 김인순은 안동김씨로 19세기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닦은 인물인데, 아마 조선 시대 거창에 수령으로 온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이가 아닐까 한다. 용천정사는 동계 정온이 가북에 설립했던 재실인데, 김인순 부사가 중건했다. - 조선 시대에는 제사와 교육이 겹쳐있었다. 이 일은 지역 유생들의 찬사를 받았는데, 그 유적이 지금 박물관 뜰에 “부사 김인순 영세불망비”로 남아있다.

 


그가 용천정사를 건립한 것은 자기 조상 김상헌과 정온의 친분과 관련되어 있는데, 두 사람은 병자호란 때 절개를 지킨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온 집안은 정희량의 반란 사건으로 몰락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인순이 정온을 기린 사업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일이 거창의 유생들에게는 칭송을 받았으나 중앙 정계에서는 탄핵, 처벌받았던 사실이다. 그 이유는 거창의 세금(환곡)이 체납된 것이었는데, 용천정사를 건립하는 데 거창 관아의 재정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실은 교육사업에서 수령의 의지가 제일의 관건이지만, 동시에 사사로움과 재정 낭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교훈을 준다.

 


둘째 단계, 20세기 전반기는 거창인의 학교 설립 열정이 돋보인 시기이다. 1930년대 초까지 면마다 초등학교가 설립되는 데, 지역민이 재정을 모은 결과였다. 또 기독교 계열의 사립학교 교육은 현재 죽전 만당에 일군의 학교로 남아있다. 그러니 어느 하나 허술하게 볼 수 없는 일이나, 여기서 필자가 들고자 하는 사례는 공립중등학교 설립 노력이다. - 당시에는 중고등학교가 통합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거창농업보습학교-거창실업고 설립 운동인데, 이 학교가 현재 거창중학교, 아림고등학교의 기원이 된다. 여기에는 지역의 ‘유지’뿐만 아니라 지역민, 심지어 해외에서까지 후원금이 쏟아졌으니, 당시 신문을 보면 그 열정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해방 직후 드디어 거창 최초의 공립 중등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은 1928년 7월 24일, 침류정에서 열린 ‘농업보습학교 창립기성회’였다. 선출된 임원은 지방회원(오늘날 군의원과 도의원), 사업가와 재산가, 면장, 교육가 등을 망라했는데, 총 30여 명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는 거창의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정태균과 독립운동가 주남재가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후 가장 적극적인 활동가는 도회원(오늘날의 도의원)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20여 년 동안 학교 설립 운동이 계속될 수 있었던 힘이, 거창군수의 지원 아래 기성회가 지역 인사들을 두루 아울렀고 그 중심에 지방의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셋째 단계, 20세기 후반기는 거창이 ‘교육도시’라는 명성을 얻은 시기이다. 이때 거창에 중등학교와 대학교가 설립되는데, 그 과정과 내용은 따로 정리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학교가 있다고 해서 교육도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교육도시란 전국에서 인재가 진학해 오고, 그들이 졸업 후 사회 각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육의 지향점, 교육의 방법, 교육의 여건이 갖추어졌을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창의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대안이 관건이다. 만약, “거창 교육도시 협의회”와 같은 단체가 설립되면, 거기서 집중하여 연구, 토론, 모색해야 할 것이다.

 


“관자”라는 책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1년의 계획은 곡식을 심는 것만 한 것이 없고, 10년의 계획은 나무를 심는 것만 한 것이 없으며, 평생의 계획은 사람을 심는 것만 한 것이 없다.” 여기서 “교육백년지대계”라는 말이 나왔지만, 이 말에 비추어 보면, 인생에서 공부만큼 중요한 것이 없듯이, 교육의 전망은 거창의 미래에 소중하리라 생각된다.

 


거창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거창인의 특징은 ‘의욕과 열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열정으로 조선 시대에는 ‘현’에서 ‘군’을 거쳐 ‘도호부’로 발전시켰고, 식민지 시대 거창에서 많은 학교를 설립해 냈다. 이러한 거창인의 문화적 유전자를 되살린다면 미래 ‘교육도시 거창’의 전망은 무모한 계획만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아무쪼록 이번 토론회가 미래 거창의 교육을 여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코멘트(Comments)

로그인 하시면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Video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