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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과 4월혁명

제1기 시민대학 제1강 이승만 정권과 4월 혁명1. 글로 쓰는 이유함께하는 거창과 전교조 거창지회가 공동 주최하는 제1기 시민대학 강좌는, 2005년 4월, 5월, 6월 3차례에 걸쳐 진행됩니다. 이번 강좌의 주제는 ‘한국의 민주주의’이며, ‘이승만 정권과 4월 혁명’, ‘박정희 정권과 광주항쟁’, ‘전두환 정권과 6월 항쟁’ 3개의 강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이번 제1강은 1950년대 이승만 정권과 4월 혁명을 다루게 됩니다. 1950년대는 한국 현대사의 기본 틀을 형성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에서는 한국의 구조는 어떠한가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특히 민주주의의 문제, 냉전적 사유방식의 문제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며 4월 혁명의 의미를 새겨보게 됩니다.강의를 끝내고 새삼스레 강의록을 작성하는 것은, 사정상 강의에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강의를 하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정리할까 고민하다가, 강의를 그대로 글로 표현하는 것이 현장을 그대로 전달하기에 더 낫겠다 싶어 구어체로 정리합니다. 그냥 죽 읽어나가면 될 겁니다.2. 이승만, 이승만 정권의 의미먼저, 이런 질문부터 드리겠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요? 사실에 근거해서 행동할까요, 아니면 인식에 따라 행동할까요? 흔히들 사람이 사실에 기초하여 행동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실제로 사람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바대로 행동하고 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학교에서 평교사이면서도 교장의 입장에서, 더 교장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또한 한국인이면서도 미국인보다 더욱 미국의 입장에서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자신의 처지=객관적 사실보다, 자신이 되고 싶은 지위=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인식이 우선하기 때문이지요. 참으로 인간 행동에서 인식은 중요합니다.몇 년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이 책 한권을 선물로 주더군요. 이런 책도 읽어보시라는 충고와 함께 말입니다. 그 책은 미국을 대표하는 헤지 펀드(투기자본) 메니저(경영자) 소로스가 쓴 책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기억에 남는 말은 딱 하나가 있는데요, 그것을 보면서 미국사람들, 자본가들은 참 무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말이었지요.“만약 내가 다른 나라의 역사를 잘 알기만 한다면, 나는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 있다.”정말 무서운 사람입니다. 소로스는 사람은 과거의 경험에 따라 인식이 형성되고, 같은 상황이 닥치면 꼭 그대로 행동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대의 행동을 미리 알고 있으니, 돈 버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한 예를 들어 봅시다. 이왕 소로스 이야기가 나왔으니 1997년 IMF 사태를 예로 들어 봅시다. 한국인은 이때 어떻게 대응했는지 기억하는지요. 그렇습니다. 금 모으기를 했지요. 사실 금 모으기는 한국의 경제위기를 해결하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금 모으기를 했을까요? 한국인의 역사적 경험 때문입니다. 1907년 일제의 경제침탈에 대하여 한국인은 국채보상운동을 벌였습니다. 금주, 금연, 폐물폐지운동 등을 벌여 돈을 보아서 나라 빚을 갚자는 것이었지요. 물론 실패했습니다. 그러다가 일제시대인 1920년 물산장려운동 때, 다시 그 모습이 재현됩니다. 금주, 금연, 근검절약으로 한국회사 제품을 사 쓰자는 것이었지요. 결과는 탐탁치 못했습니다. 그것이 1997년에 다시 재현된 것이지요.물론 지금 사람들이 100년 전 국채보상운동이나 80여 년 전 물산장려운동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렇죠. 역사책에서 배운 것입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통하여 돈과 금을 모아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다고 끊임없이 주입되었던 것입니다. 그 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은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그때와 같은 방법이 떠 올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지요. 그래서 IMF 사태 때에도 금 모으기로 나선 것입니다. 이것뿐만 아닙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때도 그랬고 성수대교 붕괴 때에도 그랬습니다. 한국인들은 홍수나 산불, 대형사고만 나면 과거의 경험=역사를 떠올리고 국채보상운동이나 물산장려운동처럼 ‘국민성금’운동을 벌입니다. 아마 앞으로도 쭉 그럴 것입니다. 그것이 해결책이든 아니든 말입니다.이처럼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은 과거의 경험, 그리고 이를 통해 만들어진 의식에 따라 행동합니다. 설사 내가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역사가 중요한 것입니다. 역사란 한 사회가 그 사회의 과거에 대해 공유하는 기억체계입니다. 한 사회는 그 기억체계에 따라 행동하게 되지요. 더 중요한 것은 역사라는 기억체제는 권력을 가진 자가 역사교육이나 교과서, 언론 등을 통하여 끊임없이 국민들에게 주입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라는 기억은 권력이 의도적으로 형성시키고 관리하며 보존한다는 것입니다.이러한 사실은 오늘의 주제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승만은 흔히 철저한 친미인사요, 반공주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권력 지향형 인간이요, 독선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지요. 친미반공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살인이든 전쟁이든 어떠한 비인간적인 일도 조금도 거리낌 없이 해치우는 인간입니다. 이승만이 왜 이런 행위를 했을까요? 이승만의 과거 경험과 그에 따른 인식의 결과입니다. 이승만의 행위는 개인의 악행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승만 정권, 즉 제1공화국은 현재 한국의 기본구조를 형성시켰습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인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만들었습니다. 이 때 형성된 한국의 기본구조와 한국인의 사고방식은 아직까지 한국인의 행동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요.3. 이승만은 어떻게 생겨 먹었나?이승만은 개항 한 해 전인 1875년에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90년을 산 후 베트남 파병이 시작된 1965년 하와이에서 죽은 인물이죠. 이승만 생애의 첫 전환은 1894년 과거 시험 응시였을 겁니다. 이 시험은 한국의 마지막 과거 시험이었지요. 재미있는 것은 이 과거 시험장에 김구도 함께 있었다는 것이지요. 아마 서로 알지는 못했겠지만, 두 사람의 악연이 시작되는 시점이지요. 두 사람 모두 이 과거에서 낙방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고, 1949년에 이승만은 김구를 암살하기에 이르니(김구 암살의 자세한 내막은 좀 있으면 역사가 밝혀내겠지요), 악연도 보통 악연이 아닙니다. 참고로 김구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이승만보다 한살 아래입니다.과거에 낙방한 이승만이 이듬해 미국 선교사가 세운 배제학당에 입학하게 된 것은 이승만이 친미파로 전환한 계기가 됩니다. 미승만은 1년 만에 배제학당은 졸업하죠. 그리고 1896년 명성황후 피살사건과 연루되어 감옥에 가는데 이때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석방됩니다. 그리고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만든 독립협회에서 활동합니다. 서재필, 이 양반은 평생 미국인 제이슨 필립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승만은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면서 정부 전복 협의로 투옥되고 탈옥을 시도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그 후 종신형으로 감형된 뒤 민영환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갑니다.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여 프린스턴 대학에서 독일 정치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죠. 이승만 박사가 된 것입니다. 1910년 이승만은 잠시 귀국했다가 YMCA 활동으로 일제에 의해 체포되는데, 이때에도 미국 선교사의 주선으로 석방됩니다. 미국 선교사의 도움과 서재필의 영향, 그리고 미국 생활은 이승만을 철저한 숭미(崇美)주의자로 만든 듯 합니다. 이후 이승만은 죽을 때까지 미국인보다도 더 미국식 사고를 갖게 됩니다.이승만은 철저한 권력지향형 인간입니다. 권력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요. 이승만의 이러한 모습은 그의 미국 생활과 임시정부 활동 때 잘 드러납니다. 이승만은 1914년 박용만으로 초청으로 다시 미국으로 갑니다. 박용만은 재미 동포들과 함께 국민회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박용만은 이승만에게 갖은 편의와 기회를 준 사람이죠. 그런데 이승만은 박용만과 권력다툼을 벌입니다. 박용만의 표현을 빌면, “이승만은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행동으로는 작당과 몽둥이질을 일삼아 자기의 조그마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정력을 소비하는 인물이다.”라고 표현됩니다. 이승만은 미국에 있는 한인사회를 분열시켰지요. 그는 보스(Boss)=장(長)이 되지 못하면 참지 못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더욱 나쁜 것은 이승만이 권력다툼에서 사용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상대방은 항상 공산주의자, 용공분자로 몰았지요. 심지어 해방 후 미군정 책임자 하지 중장에게까지 용공주의자라고 비난했지요. 이런 행위를 이후에도 쭉 계속 됩니다. 한국에서 자기와 입장이 다르면 공산주의자로 몰아버리는 나쁜 행동은 이승만에게서 비롯된 것이지요.이승만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게 되는 사건은 1919년 3.1운동 이후 성립된 임시정부에서 대통령에 취임한 일입니다. 3.1운동 이후 국내외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가 만들어 지는데, 이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서울에서 발표된 한성정부 안을 따르기도 하지요. 한성정부는 이승만을 집정관으로 지명했는데, 아마 기독도 인사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었죠. 하여간 그래서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임명 추대 했는데, 이승만은 미국에서 구미위원부라는 조직을 만들어 대통령으로 행세하게 됩니다. 임시정부에서는 분란을 피하기 위해 헌법을 고쳐 대통령제를 만들지요.이승만이 내세운 독립운동 방법은 외교론이었습니다. 미국에 의존한 것이지요. 그는 1921년 새로 만들어진 국제연맹에 소위 ‘위임 통치론’이라는 것을 냅니다. 이런 것이지요. 조선은 야만인 일본인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 그러니 문명국인 미국 등 국제연맹에서 통치해 달라, 뭐 이런 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임시정부의 독립 운동가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망명정부지만 한 정부의 대통령으로서 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죠.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을 탄핵했지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일어난 대통령 탄핵사건이죠. 이승만은 임시정부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그 이후 해방까지 20여 년간 이승만은 특별한 독립운동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직장을 가지지도 않았습니다. 재미 동포들이 한푼 두푼 낸 돈으로 잘 먹고 살았지요.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한 기간은 2년 정도였지요. 그것도 미국에서 편안하게 말입니다.이런 과정을 통해 1945년 일제가 항복할 때, 이승만은 철저한 친미반공의식을 갖게 되었고, 권력 지향형 인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미군은 이승만은 제일 먼저 귀국시키지요. 그때 한국인들 중에 이승만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고 송건호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 그의 최대 장점은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라고 말이죠. 정말 그랬을 것입니다. 그를 독립운동가, 영웅으로 만든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이후 남한에서는 이승만형 인간의 창출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철저한 친미 반공주의자,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형,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로 몰아서 처벌하는 메카시즘(메카시는 미국의 반공주의자)은 전형적인 분단형 인간으로 이승만형의 복제판이죠. 그들이 정의인 것처럼 행사한 세월이 벌써 반세기가 넘었습니다.4. 그에게는 민족 분단만이 살 길이었다!다 알다시피 미국은 친일민족반역자를 등용하여 남한을 만들었지요. 이를 미군정의 현상유지 정책이라고 합니다. 독립과 자주의 기운이 높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경향이 강한 한국에서 미국이 친미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방법은, 약점을 지니고 있는 친일파를 이용하는 방법뿐이었겠지요. 이것은 분명합니다. 당시 미국인들의 말을 들어 봅시다.“이승만이 한국에 돌아온 후 얼마 안 있어 일부 재산 많은 부유층의 영향을 받는 몸이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일제 밑에서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에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하지 중장)“정치 정세 가운데에서 가장 고무적인 한 가지 요인은 나이 들고 교육 수준이 높은 층에 속하는 수백 명의 보수주의자들이 서울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비록 일본인들과 함께 일한 사람들이지만 그 같은 비난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미군정 책임자 하지 중장의 고문과 메럴 베닝호프 보고서)“만약 그들이 과거에 일제를 위해 일을 잘 했다면, 그들은 우리 미국을 위해서도 일을 잘해 줄 것이다.” (미군정 경찰 책임자 윌리암 매크린)당시 미군정청 경찰 고위간부였던 최능진도, “경찰이 일본인 밑에서 그들에 협조한 전직 경찰관과 민족 반역자들의 피난처가 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최능진은 5.10 선거 때 동대문 선거구에서 이승만과 경쟁하다가 미운털이 박혀 6.25때 사형당하고 말지요.참 놀라운 사실은 이승만은 미국보다 더 미국의 입장에서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친미반공의식이 낳은 결과이겠지요. 해방된 지 1년이 되지도 않아서 이승만은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정읍발언이지요. 당시에는 아무도 분단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미국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지요. 미국은 좌우합작을 통해서 한국정부를 수립하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승만만이 민족분단을 주장한 것입니다.이승만은 정읍발언 이후 곧장 미국으로 날아갑니다. 그 곳에서 반공주의 의원들과 재벌들을 만나서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로비활동을 벌이죠. 거기서 미군정 책임자마저 용공주의로 몰아세웁니다.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하죠.“하지 중장이 좌익에 호의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에서 공산당 건설과 이에 대한원조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그래서 찰즈 알렌은 “이승만은 미국인 이상으로 미국의 극동 야망을 때로는 미국을 어겨가면서까지 충실히 지켜온 철저한 친미 정치인이었다.”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가끔 한국인 중에서 일본인보다 더 일본정신에 충만한 사람도 있고, 미국인보다도 더 미국입장에 충실한 사람도 있습니다. 일진회의 이용구 같은 인물이 한일합방을 소리쳐 외친 것이나, 이승만이 남한을 잘라서 친미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나 꼭 같지요.1947년이 되면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여 공산주의와 대결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한국에도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려고 결정하지요. 그리고 한국문제를 UN에 상정합니다. 이승만이 신났겠죠. 그때 이승만은 더욱 열을 내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나섭니다. 그의 말을 들어 봅시다.“이번 도미 외교에 있어 우리가 성취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첫째로 세계정세의 변화에 따라 트루먼 대통령의 대 국회연설을 계기로 미국정책이 전환된 까닭이다.”“남한에서 총선거가 지연되고 미군정이 실패한 까닭은 하지 중장이 공산파와의 합작을 고집한 때문입니다. 나는 좌우 합작의 성공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미국 정책이 공산주의와의 합작을 단념하였으므로 캄캄하던 우리의 길은 열리었습니다. 우리 동포는 한데 뭉치어 남북통일을 위한 남한 과도정부를 수립하여야합니다.”그리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섭니다. 한민족 중 아무도 남한 단정 수립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주의자는 물론이고 민족주의자들도 모두 분단에 반대하였지요. 김구와 김규식이 분단을 막기 위해 3.8선을 넘어 평양에 가서 김일성과 김두봉을 만나는 것도 이때의 일입니다. 1948년 제주도 4.3항쟁은 단독정부 수립 반대 투쟁의 대표적인 사건이었지요.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하고 선거에 참가한 사람들은 친일파로 구성된 한국 민주당(한민당)과 이승만 일파뿐이었습니다. 제헌국회가 친일파와 이승만이 중심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국회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뽑은 일도 짐작할 수 있지요. 미국은 친일파와 이승만을 이용하여 친미정부를 세웠고, 친일파는 이승만을 얼굴로 내세워 자신의 죄악을 덮으려고 했지요. 물론 이승만은 자신의 지상 목표인 권력을 얻었고요. 이것이 대한민국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미국, 친일파, 이승만, 그들의 나라였죠. 한국의 현대사 과반세기는 그들만의 나라를 국민의 나라로 바꾸는 민주화의 역사였지요. 1960년 4월 혁명, 1980년 광주항쟁, 1987년 6월 항쟁은 대표적 사건이었고, 이번 강좌의 주제도 여기에 맞춘 것이지요.5. 이승만과 김구, 기막힌 악연의 고리여기서 잠깐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를 언급하고 지나가지요. 이것을 보면 이승만 정권이 더 분명해질 겁니다.이승만과 김구는 다 같이 황해도 출신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승만이 김구보다 한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김구는 항상 이승만에게 ‘형님’ 대접을 해 주었지요. 글쎄 이게 잘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김구가 이승만에게 이용당하다가 결국 민족에게는 분단, 개인에게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니까요. 하여간 한국인이 좋아하는 ‘형님’, 이거 조심해서 사용해야 합니다.이승만과 김구는 몇 차례 만나고, 몇 차례 갈라섭니다. 아주 숙명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둘의 첫 번째 조우로, 이승만과 김구가 모두 1894년 마지막 과거에서 낙방했다는 이야기는 했지요. 이후 둘은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이미 본 바와 같이, 이후 이승만은 배제학당 - 독립협회 -도미 유학의 길을 걷게 됩니다. 반면 김구는 과거 낙방 후 동학농민전쟁에 지휘자로 참가하게 됩니다. 백범일지에 보면 ‘소년접주’라고 불렸다고 하지요. 농민전쟁이 실패한 후 김구는 잠시 만주로 피신하여 의병에 가담합니다. 그러다가 김구는 그 유명한 일본군 살해사건을 일으키지요. 1895년 일본은 명성황후 피살의 원수를 갚고자 한국에서 첩자로 활동하던 일본군 쓰치다를 살해합니다. 그리고 구속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가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고, 1898년 탈옥하지요. 탈옥 후 김구는 공주 마곡사에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합니다. 1903년 김구는 기독교에 귀의하고 신민회 활동을 벌이다가 국권 상실 후 105인 사건으로 17년 형을 언도 받게 됩니다.이승만이 기독교, 친미로 갔다면, 김구는 무장투쟁, 독립운동의 길을 걸은 것입니다. 여러분, 김구와 이승만 중 누구 키가 클까요? 김구가 큽니다. 한참 크죠. 김구는 거구입니다. 힘도 좋구요. 그러니 농민군의 장교가 되고, 일본 장교를 단독으로 살해할 수 있었겠지요. 반면 이승만은 얍삭하게 생겼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래요. 저는 둘이 찍은 사진을 보면, 그 모습에서 각자의 살아온 길이 보이는 듯 합니다.하여간 이렇게 둘은 다른 길로 가다가, 다시 만난 것은 1919년 임시정부에서 였죠. 이승만은 대통령이었고, 김구는 자기가 ‘문지기’를 원했듯이 경무국장의 일을 맡았습니다. 잠시 함께 했지요. 그러나 둘은 금방 다른 길로 갑니다. 이승만은 앞에서 말했듯이 임시정부에서 축출됩니다만, 김구는 내무총장, 국무령을 지내면서 사실상 임시정부를 이끌고 나갑니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임시정부를 살리고자 한인 애국단을 만들고, 그 유명한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를 실천하지요. 그리고 한국광복군을 만들어 일본과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이승만의 친미, 외교론과는 다른 무력을 통한 자주독립을 주장했던 것입니다.이승만과 김구가 세 번째로 만난 것은 해방 후였습니다. 둘을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때도 김구는 깍듯이 이승만에게 형님대접을 하지요. 독립촉성회나 민주의원에서 모두 윗자리는 이승만에게 양보한 것입니다. 이승만이 의장이고 김구는 부의장이었지요. 그러나 둘이 신탁통치는 반대한 목적은 달랐습니다. 김구는 신탁통치조차 반대하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절대독립을 주장했습니다. 이승만이 친일파와 결합하여 분단을 주장했던 것과 대조적이었지요. 민족 분단문제를 놓고 이승만과 김구는 마지막 결별을 합니다.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으로 나간데 비하여, 김구는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민족분단에 협력할 수 없다.”라고 선언하고 남북협상을 벌였던 것이죠. 마지막 결별의 결과로 이승만은 분단국가의 대통령이었고, 김구는 피살되었지요. 글쎄요, 일단은 이승만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죠. 역사는 누구 편을 들까요.이승만의 살아 온 경험에서 이승만의 친미 반공 독재성이 확인되는 것과 같이, 김구의 삶에서 그의 지향점이 민족통일, 자주국가 건설이 될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입니다. 둘이 결코 함께 갈 수 없었던 것이지요. 사람은 그 사람이 살아온 과거로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에게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요소를 아닐지라도, 특별할 계기가 없는 한 인간은 관성에 따라 행동하게 되지요. 그렇다면 이승만 중심의 국가와 김구 중심의 국가는 분명히 달랐을 것입니다.6. 6.25 전쟁은 분단체제를 완성시켰다.잠시 김구 이야기로 빠졌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승만 정권을 살펴 볼 차례입니다. 1948년 이승만은 분단국가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미국과 친일파의 힘을 빌었지요. 그가 당시 민족최대의 과제였던 민족반역자 처벌문제와 토지개혁에서 어떻게 대처할지는 뻔한 일이었습니다. 반민족행위자 처벌 특별위원회의 활동을 친일경찰을 통하여 해체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친일파 문제가 남아있는 것이지요. 또한 친일 지주를 기반으로 한 이승만 정권이 농지개혁을 미온적으로 처리한 것도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제1공화국의 최대 사건은 6.25 전쟁이라는 데는 다 동의할 것입니다. 이 전쟁은 민족 최대의 비극이기도 하지요. 그만큼 이 전쟁은 한민족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6.25 전쟁에 대해서는 다들 알고 있기 때문에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한 가지만 언급하지요. 북한에 대한 이승만의 자세입니다. 그의 말부터 들어 봅시다. 1949년 9월 30일, 즉 6.25전쟁 반년 전에 한 말입니다.“우리 국민들은 북벌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있는 우리 국민들은 방금이라도 그들을 궐기 시킬 것을 바라고 있으나 우리들은 온갖 방도를 다하여 그들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중략) 끌으면 끌을 수록 어렵게 될 것이외다. 한국인들이 궐기하여 그자들은 영원히 소탕하여 버리려 할진 대는 지금이 가장 절호의 시기인 것입니다.”제가 여기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이승만이 민족에 대하여 가진 입장입니다. 즉 그는 미국의 원조와 개입으로 북한을 정복하여 통일하고자 한 것입니다. 친미와 북벌이 확인되죠? 6.25 전쟁이 남한에 남긴 영향은 참으로 컸습니다. 그것은 이후 한국사의 성격을 규정하는 일이었고,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보입니다.첫째, 무엇보다도 6.25전쟁은 이승만의 권력을 강화시켰습니다. 전쟁은 인간사회의 가치관을 전도시킵니다. 평화로운 때에 인간의 최대 범죄는 살인이죠. 그런데 전쟁 때에는 적이라는 이유로, 승리라는 목적으로 살인은 정당화되고 살인자는 영웅으로 취급되죠. 또한 전쟁은 세계를 둘로 나눕니다. 아군이 아니면 적군이죠. 그 사이에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6.25 전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적군 아니면 아군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반공이냐, 용공이냐가 가치판단, 살인의 기준이 되었지요. 적군을 죽이는 것이 최대의 미덕이 되어버렸지요. 그 과정에서 친미 반공만이 인정되었습니다. 전쟁이라는 폭력으로 정당화된 것입니다. 그 이상으로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북괴군’을 물리치고 자유를 지키는 ‘국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반공 민주주의는 최고의 가치가 되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반공으로 정당성을 확보하였습니다. 국가권력이 비대화되었고, 국가의 국민통제가 강화되었습니다. 미국과 친일파를 기반으로 성립한 이승만 정권의 취약한 정통성이 6.25전쟁을 통하여 강화된 것입니다.둘째, 한국에서 진보세력이 소멸되었습니다. 전쟁으로 한국에서는 극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를 가진 정치집단만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적이었으니까요. 극단적인 반공활동 이외 모든 활동을 배제되었습니다. 특히 전쟁의 양상이 반년에 걸쳐 전선이 남쪽,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공산주의자, 적으로 몰려 처형당했지요. 6.25전쟁은 한국의 진보세력이 극도로 위축시켰던 것입니다.셋째, 한국은 미국에 종속되는 구조를 심화시켰습니다.군사적인 종속이 가장 뚜렷이 나타납니다. 전쟁 발발 20일 만에 이승만은 한국군 지휘권을 미군에게 넘깁니다.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보낸 글을 봅시다.“직접 귀하 자신이나 대한민국 내 또는 그 인접 지역에서 동 작전 지휘권 행사에 관하여 귀하에게서 권한을 받은 특정 또는 각급 지휘관들이 동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이를 이양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1950.7.14)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1953년 10월 1일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지요. 제4조를 인용합니다.“ 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미국에게 넘긴 것이지요. 지금도 전시 작전권이 미국에게 있다는 것은 다 아시죠. 이승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요? 일국의 대통령이 주권의 가장 중요한 무력인 군대를 외국에게 넘기다니 말입니다. 이승만은 한반도 분단을 민족문제로 생각하기 보다는, 전적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문제로 생각했습니다. 이승만은 자본주의 세력이 공산주의 세력을 무력으로 타도하는 것, 멸공만이 통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승만은 한국을 미국의 안보체제에 묶어 놓기를 원했습니다. 한국군을 미국에게 넘긴 것이나, 끊임없이 미국의 지원을 요청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내걸었고, 통치기간 내내 북진통일, 무력통일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그때는 평화통일을 주장하면 북한 간첩으로 몰렸습니다. 1959년 조봉암이 평화통일을 주장한다고 사형시키기까지 하였으니까요.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7. 죽음이냐, 반공이냐 - 이승만 권력 체제이승만 정권을 극우반공체제라고 규정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사실 남한의 지배자들은 태생적으로 반공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식민지 시대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1940년대 가장 존경받은 외국인이 히틀러였다는 사실은 아시는지요. 일제의 군국주의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였지요. 또한 이들에게 해방 후 반공 반소 이데올로기가 주입되었고, 분단의 과정에서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이승만 정권을 유지하는 축이었고, 반공체제는 지배체제였지요.극우 반공 운동을 해방 직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45년 말 신탁통치 반대운동(반탁)은 세계를 양분해 보는 가치관을 창출했지요. 반탁 = 애국 = 민족주의자 = 친미 = 우익이었고, 찬탁 = 매국 = 공산주의자 = 친소 = 좌익이라는 논리였습니다. 물론 허구였습니다. 우익의 많은 사람들은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반민족적인 친일 매국노였으니까요. 이러한 논리는 우익 신문과 테러에 의해 정당화되었습니다. 1949년 반민특우 습격테러 사건, 국회 프락치 사건, 김구 암살, 국민보도연맹 사건 등은 폭력에 의해 극우반공체제를 형성시키는 과정이었죠.확실히 극우 반공체제는 학살에 의해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해방 직후의 테러, 4.3 항쟁 때의 학살, 보도연맹 학살, 거창민간인 학살 등 전쟁 중의 학살 등. 학살을 공포를 조장하고 확신시킵니다. 학살, 테러, 감옥, 고문, 격리는 엄청난 공포를 낳았지요. 극우 반공체제, 극우 반공이데올로기는 공포의 산물이었습니다. 학살의 공포는 피해의식을 수반합니다. 나도 언제, 어떻게 당할지 모른다는 것이지요. 피해의식은 반공 극우체제를 지탱시키는 강력한 힘이었습니다.극우반공체제는 무지와 왜곡을 강요했습니다. 개성과 창의력은 질식당했습니다. 국가보안법에는 단지 아는 것만으로도 범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모르는 게 약이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은 위험했습니다. 국가보안법에 의해서 이적표현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살이 많았던 지역에서 오히려 그만큼 더 레드 컴플렉스나 무력증세가 심하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더 기승을 부리는 기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유족들이 끊임없이 ‘민간인’이 아니라 ‘양민’이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양민’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반공 이데올로기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갑니다. 일단 폭력에 의해 만들어진 무지와 왜곡은 학교교육이나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 등 언론 매체를 통해 강요됩니다. 그 과정에서 무지와 왜곡을 체계화되지요. 허구가 자기 논리와 체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만 들어 봅시다. 전쟁 후 모든 출판물에 반드시 게재하도록 한 ‘멸공의식 함양을 위한 우리의 맹세’라는 것입니다.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를 쳐부수자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를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성하자.반공 이데올로기는 절대 진리요, 종교의 교리요, 어기면 죽음에 이르는 금기와도 같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에 기초한 반공체제가 이승만 정권이었지요.8. 의장(擬裝) 민주주의 - 선거의 농락어떠한 정치권력이든 민(民)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정당성을 얻어야 합니다. 왕정의 경우 왕위 계승을 통하여 정당성을 얻습니다. 귀족정치의 경우 귀족회의에서 선출됨으로써 정당성을 얻는 것이지요. 민주주의는 어떻게 정당성을 얻을까요? 그것은 선거를 통해서입니다. 대통령제든 내각제든 선거는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직선이든 간선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아직까지 민주주의는 인류 역사상 인간이 발견한 가장 좋은 권력창출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가장 핵심적인 장치입니다. 민주주의는 반드시 선거라는 절차를 밟아야 권력이 인정받는다는 것이지요.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정치체제입니다. 헌법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으니까요. 권력의 창출은? 당연히 선거입니다. 이승만도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선거라는 절차를 통과해야하는 것이지요.이승만은 독재를 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핵심 장치인 선거를 농락합니다. 대한민국의 첫 선거부터 그랬습니다. 1948년 5.10 선거는 이승만과 친일파인 한민당만 참가한 선거였습니다. 국민들의 선택의 폭이 좁았지요. 게다가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민의가 올바로 반영되었다고 할 수 없지요. 하여간 이렇게 구성된 국회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이후 이승만은 대통령의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독재정치를 유지시킵니다. 6.25전쟁 중인 1952년, 이승만은 더 이상 국회에서 자신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없자 선거방법을 바꿔버립니다. 무력을 동원하여 국회의원을 위협하여 개헌을 했지요. 이른바 발췌개헌이라고 하는데, 요지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선거로 뽑는 것이었지요. 전쟁 중 직선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그런데도 문제는 남아있지요. 헌법에 대통령 3선을 금지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승만은 1954년 다시 개헌을 합니다. 개헌안은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3선 이상 대통령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국회에서 표결을 했습니다. 한 표가 모자랐지요. 그랬더니 이승만은 반올림하여 정족수를 낮추었습니다. 그래서 반올림 개헌, 즉 사사오입개헌이라고 부르지요. 이승만이 영구 집권할 수 있었습니다. 1956년 3대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지요. 진보당의 조봉암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습니다. 이승만의 탄압과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은 엄청난 표를 얻었습니다. 이승만은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결국 사형시켜버리지요. 개헌과 부정선거를 통한 이승만의 독재는 1960년 한계에 도달합니다. 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엄청난 부정선거를 자행하죠. 이른바 3.15 부정선거 입니다. 여기에서 4월 혁명이 시작된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이승만은 부정선거를 통하여 독재 권력을 유지하였고, 부정 선거 때문에 쫓겨나게 됩니다.이처럼 이승만 정권은 민주주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라는 과정을 부정함으로써 독재 권력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학살, 공포, 피해의식, 반공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당연하고요, 친일의 경력을 가지고 이승만에게 절대 충성하던 경찰과 관료가 독재 권력의 손발 노릇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승만 정권은 무늬만 민주주의였던 의장(擬裝) 민주주의, 위장(僞裝) 민주주의였던 것입니다. 가짜 민주주의라는 말입니다.9. 배제의 정치 - 홀로 남은 독재자, 이승만독재(獨裁)라는 말은 개인이나 단체, 정당이 권력을 독차지하고 모든 일을 단독으로 처리 지배한다는 뜻이지요. 권력의 독점을 말합니다. 이승만 정권을 독재체제였죠. 이승만이 독재 권력을 형성하는 과정은 배제의 과정이었습니다. 이념과 관계없습니다. 이승만에게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과 권력을 배제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우스꽝스럽게도, 1960년에는 다 배제시키고 혼자 남았지요.1945년 해방, 1848년 분단과 단독정부 수립, 1950-53년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이승만은 우선 박헌영의 남로당 등 좌익세력과 여운형 등 중간세력, 그리고 김구, 김규식 등 민족주의 세력도 배제시켜버립니다. 학살, 암살, 폭력을 통해서였지요. 그 결과 이승만과 한민당을 제외한 정치세력은 6.25 전쟁이후에는 사라져 버립니다. 이승만의 두 번째 배제는 자유주의 정치인이었습니다.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 나섰던 조봉암과 진보당을 공산주의로 몰아 배제시킨 것입니다. 이른바 진보당 사건이었고, 조봉암의 사형이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한민당 조차 배제해 버립니다. 한민당은 친일파 출신 정당이고, 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당과 공존하고 있었지요. 이승만의 자유당과 민주당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양당(2당) 체제가 아니라, 1.5당 체제였지요. 사실상 똑 같았으니까요. 그들의 대립은 단지 권력욕의 충돌에 불과했지요. 이승만은 민주당조차 배제시켜버립니다. 1958년 이승만은 국가보안법의 개악했습니다. 야당까지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벌할 수 있게 한 것이지요. 이승만이 마지막으로 배제시킨 것은 놀랍게도 국민이었습니다. 3.15 부정선거지요. 얼마나 부정을 했으면, 이승만의 득표수가 유권자 수보다 많았을까요? 그 결과는 다 압니다. 1960년 이승만은 혼자 남았습니다. 그리고 전 국민의 저항을 받아 미국으로 도주하고 말았죠.10. 원조경제 - 이승만의 경제 기반이제 마지막으로 이승만 정권의 경제적 권력기반이었던 원조경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죠. 농민의 가장 큰 희망이 무엇일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토지입니다. 해방 후 농민의 토지 소유 욕구는 폭발했죠. 좀 무리하게 말하자면 농민의 해방은 토지는 얻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이 발 빠른 토지개혁은 남한 농민들의 토지 욕구에 부채질을 했지요. 그러나 미군정이나 그와 결탁한 한민당의 친일 지주들은 농민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정부수립 전까지는 농민의 토지 소유는 좌절되었지요. 그러나 한계가 있는 법, 정부수립 후 농민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전 국민의 80%가 농민이고, 그 중 70%이상이 소작농인 상태에서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농지개혁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방식의 한계, 개혁 대상 토지 축소의 한계는 있었습니다만, 1949년 농지개혁은 농민의 토지소유 욕구를 일정부분 충족시켜주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6.25전쟁 당시 남한 정권이 농민의 이탈을 막을 수 있었던 요인이기도 하지요.그럼 친일지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승만은 친일 지주에게 일본이 남기고 간 공장을 헐가로 분배했습니다. 지주는 자본가로 변신하게 된 것이지요. 이 신흥 지주는 이승만 권력의 주요기반이기도 했습니다.이승만 정권은 경제도 미국에 의존했습니다. 당시 국가 재정의 70% 정도가 미국의 원조에 의해 채워졌습니다. 흔히 미 공법 480호라 불리는 미국 잉여농산물 원조였지요. 미국은 자국에서 남아도는 농산물을 한국에 원조함으로써, 자국의 곡가를 유지하고, 남한의 공산화를 막으며, 남한의 국방비를 충당하였으며, 나아가 원조를 미끼로 남한의 경제정책에 간섭하였던 것입니다. 한국경제는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원조경제는 한국 경제의 기본 틀을 형성하였습니다. 우선, 원조는 밀, 쌀, 면화, 설탕과 같은 농산물이 주류를 이루었죠. 그래서 한국에서는 소비재 공업이 발달합니다. 이른바 삼백(三白)경기죠. 삼성의 제일제분, 제일제당(오늘날 CJ), 제일모직이 이때 성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부와 재벌의 결탁이 이루어졌습니다. 재벌 중심, 정경유착이라는 한국 경제의 특징이 형성된 것입니다.둘째, 농민의 몰락입니다. 미국 잉여농산물의 도입은 곡가를 하락시켰고 그 결과 농민의 생산의욕과 투자, 생산력을 저하시켰던 것입니다. 밀과 면화, 옥수수와 같이 이전에 자급자족되던 농산품의 생산은 중단되어버렸죠. 농촌은 몰락되어 갔습니다.이상한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원조경제로 인해 농민이 몰락했는데, 왜 선거에서 이승만이 농촌 표를 독식했을까요? 학살과 공포, 피해의식, 그리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선거를 좌우했던 것입니다. 농민은 자신의 이해관계와 다른 투표를 강요당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선거풍토는 박정희 정권까지 계속됩니다. 이른바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죠. 지금은 이 현상이 얼마나 극복되었을까요?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농촌의 유권자들은 지금도 자신의 의사에 따라 표를 찍지 않습니다.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이죠. 자기의 의사대로 결정했다가는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피해의식이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단은 여당, 즉 1번이고, 그 다음은 공무원이나 유지, 친척, 친구에 의존하여 투표 방향을 결정짓고 있지요. 그러니 정치도 왜곡됩니다. 정당의 정책은 투표와 무관하게 되니 민심이 정치에 반영될 소지가 없고, 당선자가 국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행동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 이제 이승만 정권, 제1공화국의 권력구조를 정리하겠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두 가지 막강한 버팀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국의 지원과 반공 이데올로기였지요. 또 이승만 정권은 두 개의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친일경력의 경찰, 관료와 원조경제에 기반한 신흥 상공업자였죠. 이렇게 보면 결국 이승만 정권은 반민족, 반민주, 반민중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11. 4월 혁명4.19 혁명에 대해서는 길게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알고 계시지요. 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을 붕괴시킨 위대한 사건이지요. 여기서는 두 가지 말씀만 드리지요. 먼저, 우리가 흔히 간과하고 있는 사실 하나, 4월 혁명은 2월부터 시작되었고요, 그 주역은 고등학생이었습니다. 2월 28일 대구 유세 때, 정부는 학생들이 장면의 선거유세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인데도 등교를 지시했지요. 이에 학생들이 저항했지요. 그 후 전국 각지에서 매일 같이 고등학생들의 집회와 시위가 계속되었습니다. 4월 18일 고려대학생들의 시위, 4월 19일 대학생들의 시위 이전까지 대학생들의 시위는 거의 없었지요.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4월 혁명의 불씨를 피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4월 혁명은 이렇게 전개된 것이지요. 고등학생들의 시위 => 대학생들의 시위 => 시민의 합세 => 승리.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은, 4월 혁명에 시민이 동참함으로써 한국인의 피해의식과 침묵을 극복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폭력에 강요된 침묵을 시민적인 연대감으로 극복해 낸 것이지요. 자기 소리를 내는 것은 민주주의의 제 1보니까요.4월 혁명에서 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민들의 저항은 독재자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렸습니다. 이 사건은 세계사에서 살펴보더라도 흔한 일이 아니며, 더욱이 이승만의 폭력성과 권력욕을 고려하면, 이승만의 하야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승만이 왜 그렇게 순순히 권력을 내 놓았을까요. 여기에 미국의 역할이 있습니다. 미국이 한국군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이죠. 계엄령이 내려졌으나 군인들이 발포를 거부한 것입니다. 내막은 이렇지요. 주한 미국 대사 메카나기는 중앙청 국방부 장관을 통해 이승만 하야를 요구했습니다. 권력욕으로 물든 노독재자도 미국과 군대의 반대 속에서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지요. 결국 4월 28일 하와이로 망명하고 맙니다. 미국이 이승만 정권을 마무리 지은 셈이죠. 미국의 입장에서는 민중의 폭발을 지배 집단 내부의 권력 교체로 무마한 것입니다. 미국은 자기 역할을 다한 이승만을 팽한 것이지요.이승만 하야 이후 허정의 과도내각이 수립되었습니다. 이 과도 내각에서 개헌, 총선을 주도하였지요. 그러나 허정은 자유당 잔당에 불과하였습니다.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혁명을 수행한다.”라는 말은 4월 혁명이 제대로 결실을 맺을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여간 내각제 개헌을 했고,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하고 자유당을 몰락해버렸습니다. 민주당의 장면은 총리가 되었고 윤보선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이렇게 형성된 장면 정부는 국민의 개혁 요구를 수용할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민주당 자체가 한국 민주당이라는 친일 지주와 친일 자본가 출신이었기 때문이죠. 장면 내각은 국가의 정치 경제적 발전, 공산주의자와의 체제 경쟁, 실력대결을 강조하였습니다만, 국민들의 요구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국민들이 바란 부정부패의 청산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였지요. 결국 4월 혁명 이후 한국은 보수 정치권력으로 귀결되고 말았던 것입니다.그러나 4월 혁명 이후 민중의 진출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세 가지 측면이 돋보입니다. 우선, 혁신세력의 등장입니다. 반공독재체제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혁신세력들은 통일 사회당, 혁신당, 사회대중당, 사회당을 만들어 총선에 참여하였습니다. 비록 총선에서 실패하였지만, 반공으로 압살 당했던 진보세력이 싹을 틔웠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회활동이 활발해진 것입니다. 교원노조가 결성되었고, 피학살 유족회가 결성되었습니다.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압살 당했던 각 부분의 사회운동이 시작된 것이지요. 거창 신원의 유족들이 묘지를 만들고 박영보를 죽이는 사건이 일어난 것도 이때의 일이지요.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통일운동의 진전이었습니다. 1960년 11월 서울대 민족통일 연맹이 발기하였으며, 1961년 5월 5일 민족통일 전국 학생 연맹 준비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때, 선건설 후통일론, 중립화 통일론, 남북협상론 등 다양한 통일론이 대두하였습니다. 반공북진무력 통일 이외에는 모두 처형의 대상이었던 상황에서 획기적인 일이었지요. 1959년 조봉암이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하지 않았습니까. 큰 진전이죠. 민자통 강령으로 예를 들어 봅시다.1. 우리는 민족 자주적이며, 평화적인 국토 통일을 기한다.2. 우리는 민족 자주 역량을 총집결한다.3. 우리는 민족 자주의 처지에서 국제우호의 돈독을 기한다.그러나 4월 혁명이후 일련의 진전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압살되었습니다. 혁신계열, 교원노조등 사회운동, 통일운동은 박정희 군부세력의 탄압으로 또 다시 숨을 죽여야 했습니다. 평화통일에 관한 논의도 10여년 후 1972년 7.4 공동성명에 의해 모습을 나타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4월 혁명을 완성되지 못한 혁명, 즉 미완(未完)의 혁명이라고 합니다.12. 남겨진 과제들이승만 정권 12년간은 한국사회의 기본틀을 형성시켰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4월 혁명은 이 체제를 붕괴시켰습니다. 그러나 냉전분단반공독제체제를 완전히 해체시키지는 못하였습니다. 미완이었지요. 그럼으로써 남겨진 과제는 무엇일까요. 아직도 한국사회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몇 가지를 지적하며 강의를 마치고자 합니다. 현재 거창을 놓고 토론해보도록 합시다.첫째, 남한의 낭전구조는 얼마나 청산되었을까요?그 핵은 반공 이데올로기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남한사회를 유지시켜온 이념이자, 최고의 판단기준이었지요. 무지와 왜곡, 그리고 학살을 무기로 무차별적으로 국민에게 주입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기반을 둔 극우 수구세력은 현재 얼마나 청산되었을까요?둘째, 민주주의와 선거의 문제입니다. 민주주의의 핵심 장치는 선거입니다. 지금 유권자들이 냉전의식 피해의식에서 얼마나 벗어났을까, 또 투표의 결정 구조가 자기 의지를 표로 연결시키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되었는지요. 그리고 유권자들이 주권의식을 가지고 투표를 하고 있는가요?셋째, 한미관계입니다. 전쟁 시 군 작전권은 아직 미국에게 있습니다. 유엔이지만 사실은 미국이지요. 이런 것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인의 친미의식은 객관적인 국제관계 인식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한미관계가 동맹관계인지를 생각해 봅시다.넷째, 종속적인 경제구조의 문제입니다. 미국의 대한 원조로 형성된 종속구조, 재벌위주 경제, 정경유착, 그리고 농업의 침체는 얼마나 극복되고 있을까요?마지막으로, 통일에 대한 문제입니다. 한국인의 대북인식은 한 민족이라는 입장인지, 평화, 합의 통일의 과제는 얼마나 달성되고 있는지 토론해 볼 일입니다. 감사합니다.(2005.4.22. 복지회관 소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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