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위기? 새로운 기회!
유영재
사회과학에서 낡은 도식 중 하나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진보’라는 개념을 이념적 경구로 읽건 인간의 삶의 조건의 발전으로 읽건 마찬가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심히 받아들이는 ‘역사의 진보’는 상식이 되었지만, 사실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다. 아무리 길게 보아도 근대의 산물일 뿐이다.
근대 이전 인간의 시간관념이란 반복에 다름 아니었다. 아버지가 살아오신 대로 내가 살고 내 아들이 또 그럴 것이었다. 발전이란, 도구가 석기에서 청동기와 철기로 바뀌듯 수만, 수 천 년에 걸쳐 일어났기에 경험하거나 예측할 수 있는 미래에 일어날 ‘진보’는 거의 없었음으로 그런 관념 또한 없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이 생산되고 발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근대에 와서야 비로소 ‘진보’에 대한 관념이 생겨난 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철학사에서 보면 헤겔의 “세계는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한다”는 주장은 역사적으로는 완전히 새로운 주장이었지만, 근대에 관찰된 세계적 현상을 전 역사에 걸쳐 일반화시켜 버렸다. 마르크스가 노동자들을 상대로 선동적인 주장을 하면서 헤겔을 관에서 꺼집어 내어 써먹기는 했지만, 그 스스로도 헤겔을 일컬어 낡은 관념론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의 철학적 성찰은 차라리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희극으로 또 한 번은 비극으로”라는 경구에서 더 적실하다.
소련이 해체되고 동구가 몰락하였을 때, 진보의 길을 포기하고 기득권에 전향한 사람들의 역사의식은 딱 헤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헤겔의 역사인식에 머물러 있을 때에만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 절망으로 읽힐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통합진보당 사태를 지켜보면서 또 한 무리의 기득권에 전향한 사람들을 본다. 우리가 아무리 개판을 쳐도 역사는 진보할 것이라 믿는 덜 떨어진 무리들이거나, 자신들이 권력을 잡지 않으면 역사가 종말을 맞을 것으로 믿는 몽매한 자들이다. 어느 경우든 낡은 진보의 전형이다.
통합진보당 사태를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사이, 진보진영의 ‘경제브레인’ 중 한 명인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이 통합진보당 입당을 선언했다. 장기간 표류할 것이 뻔하지만 똥이 잔뜩 묻은 진보정당에 이제사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진보시즌2 개막을 앞당기는 길이란다.
수많은 시민들이 통합진보당으로 몰려가서 그 당을 완전히 새로운 시민적 진보정당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면, 허깨비 같은 NL적 의제 같은 것에 매달리는 정당이 아니라 시민들과 더불어 일구어내는 민주적 축제 속에서 인권과 민생-복지 같은 참으로 진보적인 의제들의 해결을 최우선의 정치적 과제로 삼는 그런 정당으로 탈바꿈시켜 낼 수 있다면, 이번의 위기는 그야말로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앞으로 10년, 20년 후가 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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